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성 전투 (문단 편집) === 6월 중공군의 대공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040.png|width=100%]]}}} || || 6월 공세 경과도 || 중공군이 하계공세를 시작한 5월 초 무렵, 중공군의 공세는 미 제9군단과 국군 제2군단이 위치해 있는 금성 돌출부쪽으로 공세방향이 지향되었는데 이는 4월 말에 개시한 소규모 공격과는 다른 대규모 공격이었으며 이 때문에 8사단의 마제형 고지가 피탈당하고 중공군은 789명 전사, 8사단의 피해는 전사 181명, 부상 262명, 실종 23명등의 막대한 손실을 내었다.[* 이 공세를 시작한 원인에는 1953년 6월 21일에 작성된 육본기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5월 18일 체포된 46군 133사단 소속 포로 진술에 의하면 현재 적은 공격을 감행할 기도를 충분히 갖추고 있으며 이번 공격이 결과로 휴전회담에 대하여 압력을 한번(一番) 더 가하자는 것과 국군 및 유엔군을 시험해보자는 것과 북진을 절제하고 있는 한국군에게 미리 일침을 주어 북진기도를 봉쇄하는데 있으며 전(全) 전선에 걸쳐 모색전을 시도하려는 말을 중대 정치지도원(政治指導員)으로부터 들었다 함."] 이후 중공군은 5월 23일에 수도사단 회고개를 공격하는 것을 끝으로 5월 26일 제1차 하계공세를 끝냈고 다음날인 5월 27일 하계공세의 제2단계 작전 즉, 6월 공세 준비에 들어갔다. 이 공세는 공격목표를 대대급 진지로까지 확대할 뿐만 아니라 전(全) 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중부전선의 9병단 예하 제23, 24군과 20병단 예하 제60, 67군 및 19병단 예하 제1, 46군은 물론 동부전선 일대에 배치된 북한군까지 동원해 1951년 춘계공세 이후 최대 규모의 전력으로 6월 공세를 개시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중공군은 이 공세의 주목표를 미군으로 지정했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중공군 각 부대들은 5월 27일, 미 제1군단의 전초진지인 후크고지와 네바다 고지를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동부 미 제10군단의 우측 854, 812고지 및 제1군단의 351고지를 각각 공격하였다. 그러나 6월 1일, 중공군 지휘부에서 공격 주목표를 기존 미군에서 한국군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이승만 정부의 휴전반대와 북진통일 주장 때문이었다. 당시 휴전회담에서 유엔군측은 "5.25 최종안"을 제시하여 포로 의제의 타결을 이끌었으나 이 안은 "'''포로의 자유송환원칙은 고수하되 반공포로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인도한다"'''는 내용문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휴전반대와 중립국 송환위원회 후송에 대해 반대를 표하던 한국정부는 크게 분노했고 결국 이승만 정부는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하자는 성명문을 발표했으며 이에 중공군 사령부측에서는 한국정부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주겠다며 작전계획을 변경하라고 지시했던 것이었다. 이후 중공군은 작전이 변경됨에 따라 기존에 구성되었던 공격 부대편성도 더 강하게 바꾸었다. 먼저 제16군을 제9병단에 배속시켜 제23, 24 양개군의 1개 사단 방어임무를 인수하도록 해 방어편성을 더 강화시켰고 그 다음에 제21군을 모두 곡산지역으로 이동시킴에 따라 제21군을 지원군의 예비대로 둠으로써 중부전선 및 금성돌출부 지역 좌익 중공군 전력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이로써 중공군은 6월 공세 공격편성을 모두 끝냈고 그 다음에 주공인 제20병단은 6월 4일 작전회의를 열어 반격작전 계획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를 하였다. 이 회의에서 20병단은 예하의 제60, 67 양개군의 총전력을 집중해 북한강 동서 양측의 국군 제8, 5사단을 공격하고 차후 2개 사단 이상의 국군 부대가 반격할 가능성을 대비하여 면밀한 방어편성 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20병단은 군으로부터 추가적인 포병지원을 받아 약 1주간의 준비기간을 가졌으며 6월 10일을 공세 개시일로 정했다. 그리고, 1953년 6월 10일 중공군은 6개 사단과 [[예비대]]인 4개 사단, 34개 대대 [[포병]] 390문의 [[야포]] 및 보급을 위한 말 1만필과 마차 1500대를 동원한 6월 공세를 개시하였다. 중공 제20병단 60군은 한국군 5사단 주저항선인 [[949-973-883고지 전투|949-973-883고지]]를, 제67군은 한국군 8사단의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지형능선-수도고지를 각각 공격했다.]] 당시 금성돌출부 좌견부에는 미 제9군단 중앙우익인 9사단 1개 연대, 군단 우익 수도사단, 돌출부 선단과 우견부에는 국군 제2군단의 6사단, 8사단, 5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에 미 제8군 예비대로 3사단이 돌출부 어디든 3시간 내 도착할 수 있도록 2군단 지역 내에서 대기중이었다. 사단의 편제 지원부대 외에는 2군단의 1개 전차대대, 야전공병단, 군단포병 2개 155mm 포병대대, 미 제5포병단이 있었으며, 미 제9군단의 국군 사단들은 9군단포병 10개 포병대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여하튼 공세 직후 제2군단은 급속도로 전선에서 밀리게 된다. 먼저 8사단의 경우 6월 12일에 전개된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에서 수도고지를 상실함과 동시에 지형능선의 제1, 2방어선을 모두 상실했고 결국 제2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제5사단 경우에도 역시 [[949-973-883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181사단의 공격으로 인해 6월 11일 973고지와 883고지를 상실하였다. 이후 5사단과 8사단은 빼앗긴 고지들을 탈환하기 위해 반격작전을 펼쳤으나 이중 8사단은 오히려 중공군에게 역습을 받아 각 부대들이 와해되는 등 반격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으며 제5사단도 3차례에 걸친 역습을 감행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제2군단 사령부는 6월 14일 밤, 제5사단과 8사단 21연대에게 현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전면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더 이상의 반격은 무의미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5사단과 8사단은 군단이 지정한 신 주저항선(아이슬란드)으로 철수하고 5사단은 제3사단에게 좌측방 구역을 인계한 뒤 부대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렇게 금성돌출부에서 전개됐던 6월 공세는 끝났고 2군단은 전선에서 약 4km 정도 밀려나게 되었다. 해당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격은 11일에 하루에만 6만발을 기록하는 등 전쟁에 참전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하였으며 [[유엔군사령부|유엔군]]과 미군의 전투기 출격횟수 또한 2143회를 기록함으로서 참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6월 공세 시기 한국군 8, 5사단이 소모한 포탄은 총 38만발인데 중공군은 이보다 살짝 적은 31만발의 포탄을 소모하였다.] 6월 18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 일부를 점령하는 소기의 목적을 이룬다. 이 공세로 한국군은 1만명의 손실과 중국군은 2만명의 손실로 합쳐서 총 3만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